초등학교 때 검도 도장을 4년 정도 다닌 적이 있다. 입부를 하기 위해 엄마와
누나랑 같이 도장에 갔을 때 나는 처음 보는 목검과 죽도, 가검을 보며 너무
멋있어서 검을 계속 만지고, 들어보고, 만화 속 주인공처럼 휘둘러 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검도 도장에 입부를 하고 검은띠를 따게 된 후부터는 목검이 아닌,
개인의 가검을 구매해서 그걸 이용해 수업을 했었다. 보통은 가검은 도장에
놓고 다니지만 어떤 날에는 가검을 집에 가져가 도장에 왔다 갔다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날에는 가검을 쌓는 천으로 된 포에 잘 넣어 학교에, 그리고
시내에 들고 다녔다. 그걸로 이제 친구랑 칼싸움을 하거나 공터의 풀을 베고
놀았다. 사실상 미야모토 촌의 촌뜨기 무사 무사시가 나였던 거지 ㅋㅋ 지금
생각하면 그 장면이 얼마나 어이가 없고 웃겼을까? 21세기 촌동네에 초등학교
4년 정도 된 아이들이 도복을 입고 허리춤에 검을 메고 그걸로 시내와 공터를
돌아다니며 풀을 베고 다녔으니 ㅋㅋㅋㅋ 그 장면을 상상하면 그냥 골 때리고
어이가 없어서 웃김 ㅋㅋ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무렵 이제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전에 도장을
그만두었고, 나와 다른 한 친구만 아직까지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이제 3단
승급 심사를 위해 진검으로 대나무 베기 연습을 하러 토요일에 나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랑 남은 한 친구는 토요일에 도장 봉고차를 타고 약간 외진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짚단이나 대나무 베기를 연습하는
장소로 이미 사용한 대나무와 짚단, 그리고 진검이 있었다.
그날 나는 실제로 진검을 처음 보고, 쥐고, 베어보게 되었다. 실제 진검을
사용해 본 적이 있는가? 칼날을 갈며 생긴 아름다운 물결 모양, 가검과는
비교가 안되게 고급스럽게 빛나는 은빛의 쇠날과 곡선의 모양, 생각보다 더
무거운 무게와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 내가 혹여나 실수로 손이 미끄러져
검을 놓친다면 주변의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압박감은 날 더 긴장하게
만들며, 손에 땀이 나며 더욱 손잡이를 꽉 쥐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런 무서운
검을 보며 아름다움과 묘한 기분을 느꼈다.
대나무를 눈앞에 두고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있을 때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대나무를 일도양단 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힘이 세다고 잘 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진정시켜 어떤 각도로 어떻게 베어야 할지 고민하고,
혹시나 칼이 손에서 미끄러져 날아가 버리면 어쩌지? 같은 잡념을 없애며, 손을
흔들림 없이 단 한 칼에 일자로 내려야 대나무가 올곧게 절단된다. 오로지 내
앞의 대상을 올곧게 벤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깔끔하게 벨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앞의 대상이 대나무가 아닌, 단 한, 두 번의 합으로 누군가 죽거나 불구가
되는 사람이라면? 검을 들게 되는 순간, 내 눈앞의 대상이 대나무든 사람이든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끊임없는 내면의 질문과 겨우 정답을 찾은 것 같다가도 금세 또 모든 게
희미해지고 무의미함을 깨닫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반복하며 희로애락을 느끼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다 어느새 나이를
먹고 죽는다. 배가본드는 이런 것들을 담은 만화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마음속 공허와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까?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 높은 위치에 올라서도 성취감과 기쁨은 잠시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또 공허와 외로움이 다가온다. 살아가며 가끔 느끼는 사람과의
따뜻함과 행복을 진통제 삼아 살아가지만, 결국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것들과 싸우며 살아간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마을 사람,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귀신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고, 결국 마타하치의 할머니한테도 배신을 당하고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모여든다. 그리고 무사시는 정말 살인귀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마을 사람들을 패고, 타쿠앙 스님에게 붙잡혀 바위에
머리를 박아가며 죽기로 한다. 인생을 내려놓고 모든 걸 자포자기 한 심정,
그리고 타쿠앙 스님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와 이유를 찾기 위해 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오츠를 떠나 사람을 죽이고, 농사를 하며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아 나가는
미야모토 무사시, 지옥 같은 곳에서 나고 자라며 반쯤 죽은 상태로 오로지
사람을 죽이며 살아가다, 죽고 죽이는 나선에서 내려와 누군가를 지키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시시도 바이켄, 자신이 죽을 걸 직감하며
무서워 몸이 떨리고 눈물이 흘러도 무사시와의 대결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딛히며 아름답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덴시치로.
누군가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해지기 위해 검의 길을 걷고, 죽음이
무섭지 않고 공허하던 누군가는 한 아이를 만나 삶의 목적과 이유가 생겨
자신을 벤 눈앞의 상대에게 목숨을 구걸하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오로지
눈 앞의 상대를 이긴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검을 통해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친구가 되고, 결국 둘 중 누군가는 죽고 슬퍼한다. 각자 자신의 삶의 의의를
찾아가는 과정은 눈물 나게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아무리 수 천, 수만의 대화가 오고
가도 결국 서로를 이해하는 건 아주 극히 일부분이다. 그것마저도 감정이
동화될 정도로 온전히 이해하는 건 극소수. 말이라는 건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전달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이노우에 선생님도 이걸 알기에 만화를 그리고,
사사키 코지로라는 캐릭터를 넣은 것이다. 소리를 듣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는
사사지 코지로지만 자신과의 대화로, 눈으로, 표정으로 타인과 대화를 하고
오히려 누구보다 타인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한 캐릭터이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전해지지 않는 그런 것들을. 가끔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가 가족이나
친구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한다는 듯한 눈빛으로 볼 때처럼.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중간고사 직전에 학교 도서관에서 친구가 빌려온
슬램덩크를 보고 완전 빠져서 새벽 3시까지 슬램덩크를 봤던 적이 있다. 시험
점수가 어떻게 나왔든 그 순간은 아쉬움 없을 정도로 슬램덩크는 나에게
즐거움과 떨림을 주었다. 10년이 지나 배가본드로 다시 이노우에 선생님의
만화를 보게 되었고, 또 나에게 많은 것들을 주었다. 즐거움 그 이상의 것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 슬램덩크에서 느끼고 배웠던 것들과는 또 다른
것들을.
무사시에게 인에이와 야규 할아범의 영혼들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대화를
하듯, 나에게는 이노우에 선생님이 말을 건넨다.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너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노우에 선생님의 질문을 곱씹으며 그의
발자취를 보고 배우고, 결국 그 끝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이노우에 같은 사람도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길을 찾고 살아갈 것인가? 그 끝은 결국 평범한 일상 속 행복으로 귀결된다면
그냥 흘러가는 삶 속 소소한 행복들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 속에서 이노우에 선생님은 농사꾼이 된 무사시를 통해, 서서히
사람들에게 마을을 여는 슈사쿠를 통해 말한다. 이렇든 저렇든 결국 사람은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순수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도와주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한 삶이다 라는 걸. 그리고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늘은 모두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이노우에 선생님에게는 개인적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의 만화들로
인해 나는 즐거운 추억을 갖게 되었고, 또 성장하게 되었다. 배가본드를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한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려본 사람,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보고자 노력한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노우에 선생님이 너무 외롭지 않게, 좀 더 웃으며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하며.
감사합니다. 다케히코 이노우에 선생님. 진짜루요~
2025년 10월 26일